
현대의 능력주의에 대한 신화는 한국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미국보다도 더 강력한 믿음 속에서, 한국인들은 자신의 노력이 언젠가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살고 일한다. 부유하고 성공한 사람들은 오로지 자신의 손으로 이뤄냈다는 믿음에서 위안을 얻고, 반면 하층 계층은 ‘노동이 곧 해방’이라는 믿음에 용기와 투지를 얻는다. 서로 다른 이유로 분열된 사회임에도, 능력주의를 이야기할 때만큼은 유독 하나로 뭉쳐 보이는 모습은 참으로 눈에 띈다.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능력주의는 분명 매력적인 이데올로기다. “하루 일한 만큼 하루 벌이를 얻는다”는 오래된 격언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반드시 보상받는다는 간단하면서도 강력한 믿음을 대변하는데, 이는 노동의 기원 자체와 맞닿아 있다. 실제로 6세기 중국에서는 시험을 통한 행정적 능력주의가 시행되었고, 칭기즈 칸은 오로지 능력만을 기준으로 장수들을 선발하기로 유명했다. 이는 능력주의가 오래전부터 높게 평가되어 왔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러나 이러한 ‘순수한 능력주의’가 현대 사회에서도 그대로 유지된다고 믿는 것은 착각이며, 이는 직간접적으로 지속해서 사회에 해악을 끼쳐왔다.
현대 능력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이 이데올로기가 사회적 불평등이 크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제하거나 오히려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간단한 수렵·채집 사회에서의 능력주의 전제는, “가장 많이 일하는 사람이 가장 많은 생산물을 얻고, 따라서 가장 많은 이득을 얻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대 경제에서 능력주의의 의미는 달라졌다. 사무직이 보편화된 오늘날의 직장에서, 능력주의는 보통 “업무를 효율적이고 성실하게 해내는 사람이 승진과 더 높은 급여를 받는다”라는 형태로 여겨진다. 하지만 현대 경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또 사회 전반에 만연한 맹목성과 순진함 때문에 이 모델에는 세 가지 문제가 생긴다. 첫째, 조직의 상층부에 있는 사람들이 정말로 능력과 성실함을 가장 우선시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보상하려는 동기가 있는지를 전제해야 한다. 둘째, 현재 존재하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무시한다. 셋째이자 가장 중요한 점으로, 모든 노동자에게 공평한 출발선이 주어졌다는 가정에 의존한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공평한 출발선이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을 뿐 아니라, 기업의 고위층이 꼭 ‘능력’을 최우선으로 찾고 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사무실 내에서 윗사람들의 사적 이익 때문에 연줄과 친분이 횡행하고, 재력이나 개인적 관계가 능력이나 성실성보다 더 큰 영향력을 미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문제를 더 깊이 들여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아예 경쟁의 장에 들어설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능력이란 사회의 구조, 가치관, 관습에 부합하기 때문에 ‘사회가 선호하는 특성’이라 할 수 있는데, 교육과 지위를 갈수록 중시하는 사회에서 능력은 부와 지능의 결합으로 설명될 수 있다. 능력주의의 다른 모든 문제를 관통하는 핵심은 ‘능력’이 자연스럽게 불평등하게 분포되어 있다는 점이다. 흔히 지능의 척도로 활용되는 IQ나 학업 성취도는 가정의 재정 상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력은 누구에게나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는 주장으로 인해, 실제로는 공정하지 않은 능력주의가 용인되고, 사회적 특권층 이외의 계층은 부와 권력의 요새에서 계속 배제된다. 이는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대학 졸업장이 없는 사람은 좋은 기업에 입사할 기회가 대학 졸업장 보유자에 비해 현저히 낮다. 또한, 낮은 사회·경제적 배경 출신자는 직장 내에서 여러 편견의 대상이 되곤 한다.
무엇을 ‘능력’으로 보느냐에 대한 사회적 인식 또한 근본적 문제다. 많은 현대 국가에서 블루칼라 직종(배관공, 건설 등 육체적 노동이 포함된 일)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어려운 업무를 해내는 엄청난 수고를 들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하찮은 일’로 여겨지며 무시당하거나 경멸의 시선을 받는다. 물론 낮은 사회적 배경에서 시작해 노력으로 큰 부나 지위를 얻는 사례가 전혀 없지는 않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일 뿐이며, ‘예외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오히려 이러한 현상의 일반성을 입증한다. 대체로 현대 사회의 계층 사다리는 매우 경직되어 있어, 거의 봉건 체제에 가까울 정도로 이동성이 낮다.
이처럼 결함 있는 능력주의적 사고방식은 여러 측면에서 유해하다. 가장 직접적인 문제는, ‘저숙련’으로 간주되는 직업군을 택하려는 사람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블루칼라 직종은 우리의 일상생활과 경제에 필수적임에도, 부정적 사회 인식에 사로잡혀 노동자가 부족해지고, 그와 반대로 화이트칼라 사무직 종사자가 과잉 공급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이는 해당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낮게 평가된다’는 이미지를 덧씌울 뿐 아니라, 경제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더 깊은 차원에서, 이러한 사고방식은 사회적 행동의 가능성과 동기를 약화시킨다. 능력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시스템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믿지 않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직장에서 부당함이 있거나 개인적으로 실패했을 때, 그 원인을 먼저 자신에게서 찾는 경향이 짙다. 이러한 자기 내면화, 즉 “내가 부족해서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태도는 기존의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맞서 목소리를 내거나 저항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과거 같았으면 이 정도의 부의 불평등이 심화되면 혁명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능력주의라는 베일이 사회의 불균형을 가리고 있는 셈이다.
앞서 언급한 편견들과 맞물려, 이는 하층 계급에게 더 큰 절망감을 안긴다. 사회적 사다리를 오를 기회가 차단된 노동자들은 빈곤에서 벗어날 길이 봉쇄된 악순환에 빠진다. 그럼에도 그들은 부조리한 사회에 분노하기보다, “내가 못나서” 혹은 “내가 게을러서” 가난하다고 여기기 쉽다. 이는 그들을 절망으로 몰아넣는다.
능력주의는 개인에게도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 과도한(그러나 인위적인) 경쟁 속에서 스트레스와 불행감이 팽배해지며, 극단적인 경우 자살률이 높아지는 형태로 드러날 수 있다. 실제로 한국의 사례가 그러하다. 청소년기가 대학 진학에 결정적으로 좌우된다는 인식 때문에, 아이들과 청소년들은 거의 전 생애에 걸쳐 끊임없이 경쟁과 학업 부담에 시달린다. 이로 인해 한국에서 청소년 우울증과 자살률이 높은 것도 무관하지 않다.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분명하다. 첫째, 능력주의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가짜’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 모호한 이념을 바라보며, 이 체제가 부패해 있으며, 불평등을 공고히 하고, 우리가 살고 싶은 사회의 토대가 되기 어렵다는 점을 분명하게 지적해야 한다. 둘째, 사회적 편견을 줄이고 이른바 ‘저숙련’ 노동에 대한 존중을 높여야 한다. 블루칼라 직종은 현대 사회를 지탱하는 핵심이며, 젊은 세대가 이러한 직업의 가치와 장점을 충분히 인식하도록 교육해야 하고, 대중매체 역시 다양한 노동 현장을 균형 잡힌 시각으로 다뤄야 한다. 능력주의가 단지 현대 엘리트들의 지적 놀이감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로 사회에 녹아들려면, 진정한 의미에서 ‘능력’을 기반으로 한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능력주의는 사회가 꿈꾸는 이상적인 상태이지만, 어떤 꿈도 노력 없이는 실현되지 않는다. 우리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진정으로 ‘능력주의적인’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2025.01.10
김성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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